학창시절 回想

학창시절 회상 6

金 素軒 2008. 7. 18. 20:54
나의 酒歷도 어언 40여년 된것 같다.

주량이 약한 나는 한잔만 마셔도 紅顔이 되지만

술이 있는 그 분위기를 아직도 좋아한다

60년대 보릿고개 시절 西厓 柳成龍선생 고택이 있는 안동 河回마을 근처 외가에서

방학을 보내며 여름이면 논밭에서 메뚜기를 잡고 겨울이면 초가 처마밑에 있는

참새를 잡아 모닥불에 구워서 안주를 삼으며 농가에서 직접 만든 막걸리로

새참을 먹기도 하고, 마실에서 호롱불로 밤새우며 이웃사람들과

오손도손 모여서 노닥거리며 술을 배웠다.

농사일을 거들면서 농주를 짜낸 술 찌게미로 시장기를 떼우다가

술에 골아 떨어지기도 하였다.

무한경쟁시대 속도를 강조하는 디지털 세상과 이기적인 개인주의 삶이 만연된

21세기 도시문명에 살면서 그시절 전화도 전기도 없는

공동체적 생활을 한 시골의 '마실문화'가 그립다.



高2 겨울방학에는 대구 중앙통에서 여고생들과 만두를 먹으면서 고량주를 곁들이다가

품행 불량학생으로 단속반에 걸려서 학교를 중퇴하기도 했다.

안암동 학창시절 제기동과 무교동 골목에 있는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를 즐겼다.

74년 봄학기 민청사건에 연루된 친구들이 수배가 되거나 구속이 되었다

암울한 시국에 대한 울분과 괴로운 마음에 무교동에서 서클 동료들과 사발식을 하며

인사불성이 되도록 대취했다.

막차 버스를 타고 안암동 로타리에 있는 하숙집으로 오는데 버스가 신설동 고가도로를 넘는데

속이 울렁거려 Overeat 를 했다.

승객들 한테 구토한 파편이 튀기도 하고 버스안이 난장판이 되며 버스안내양이

부축하여 대광고 앞에 내렸다.

高大 뱃지를 보고는 승객들도 세탁비 배상 요구도 안하고, 버스기사나 순진한 안내양도

세차비나 토큰 받을 생각도 없이 만취한 학생의 실수로 생각하고 너그러운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요사이 각박한 세상과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주머니가 좀 여유있으면 명동에 위치한 ' OB's Cabin' '뢰벤브로이'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상사맨 시절에는 비즈니스와 연관된 술(商酒)로 날밤을 지새웠다.

바이어 상담 핑계(?)로 일류 호텔 양식당에서 양주를 마시고

강남의 룸살롱도 수시로 다녔다.

접대란 명목으로 술마시는 품격보다는 이해타산적으로

비싼 술집에서 난잡한(?)분위기에 휩쓸렸다.

20여년동안 비즈니스로 인해 거래처와 마신 술에 엄청난 수업료를 낸것에 비해

술의 진경, 진미를 모른체 마셨다.



趙芝薰 (국문과,1920-1968)교수께서 '酒道有段'이란 글에서

음주에는 무릇 18계단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서야 멋있는 벗들과 담소하며 초급인 學酒

(술의 眞境을 배우는 사람)의 단계에 입문하고 싶다.

예전 선비들은 술을 마시며 멋과 담론, 해학이 어우러진 풍류를 즐겼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그동안 생존과 가족을 위해 우리 모두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 왔던가?

이제는 서서히 평생을 짓눌러 왔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탐욕도 성냄도 없이 물처럼 바람처럼

아무런 속박과 구속 없이 들꽃처럼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興에 취하고 싶다
남은 여생이나마 청정한 영혼, 조용한 달관, 절제된 감정, 가지런한 몸가짐으로

光風齊月(천성이 고명하고 胸中이 맑음)한 벗들과
경치와 우아한 분위기에서

술한잔 마시며 인생사
아름다운 행로난(行路難)과 한단지몽(인생이 한바탕 꿈처럼 덧없음)을 논하며

풍류와 품격있는 여생을 보내고 싶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