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回想

[스크랩] 1975년 3.31~4.8 유신헌법 철폐 시위-휴교령-학도호국단 창단

金 素軒 2012. 9. 11. 12:16

 


1천 5백여 학생들은 비상학생총회를 소집, 유신헌법 철폐 구속학생 석방 고문정치 종식등을 요구하며 4차례에 걸쳐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텅빈 대강당의 주인 없는 의자가 그날의 시위를 무언으로 대변하고 있다(1975년 3.31) <출처 : 고대신문사>

 

 


굳게 닫힌 교문 앞에서 경찰들이 중무장한 채로 대기하고 있다(1975.3.31~4.8). <출처 : 고대신문사>

 

 


날쌘 사복경찰이 시위학생을 무차별 연행하고 있다(1975.3.31~4.8). <출처 : 고대신문사

 

 


황혼의 캠퍼스에 뒹굴고 있는 돌들. 교정에는 페퍼포그와 최루탄가스로 자욱했다. (1975.3.31~4.8). <출처 : 고대신문사>

 

 


교내에 상주하고 있던 기관원들의 모습을 익살적으로 묘사하여 현상체포령을 내린 공고문. (1975.3.31~4.8). <출처 : 고대신문사>

 

 


4월 7~8일의 시위로 긴급조치7호가 선포되어 휴교령으로 인해 군이 주둔, 41일간 휴교를 해야만 했다(1975년 4월 8일).

<출처 : 고대신문사>

 

 


트럭에서 하차한 주둔군이 작전지시를 받고 있다(1975년 4월 8일). <출처 : 고대신문사>

 

 


APC를 앞세운 주둔군은 학교내의 모든 교직원. 학생들을 캠퍼스 밖으로 몰아냈다(1975년 4월 8일). <출처 : 고대신문사>

 

 



41명 제적, 7명 무기정학.- 시위사태에 대한 징계

본교는 지난 휴교기간 중 본교생 41명을 제적하고 7명을 무기정학 처분했다. 이들 징계 학생들은 모두 지난 3월 31일 과 4월 7~8일에 있었던 시위사태와 관련된 학생들로 학교당국은 4월 14일 두 차례의 교무위원회를 거쳐 32명을 제적한 데 이어5월 10일 다시 9명을 추가 제적, 7명을 무기 정학 처분한 것이다.

이번 제적으로 총학생회는 이윤세(통4) 총학생회장을 비롯 거의 전원이 징계 되었다. 이번 징계 학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적생은 김기원(행정1), 박강수(행1), 김상문(행4), 조성우(행4), 권순성 (경영3), 박구진(경영3), 신헌식(경영3), 고광석(경영3), 김경석(경영3), 노현규(경영4), 김우규(경영4), 김희정(무역3), 김중기(중문3), 김성근 (심3), 도천수(철3), 최봉영(철3), 김윤겸(철3), 김성곤(사4), 최규엽(독문 2), 임철(정외3), 채종록(통계4), 이윤세(통계4), 윤한영(토목4), 김원석(기계4), 이근식(화공3), 신태식(교육2), 심성보(교육3)(이상 4월 14일 제적자)


김연신(법4), 이광호(식공2), 박광옥(공1), 서원기(심1), 김재창(영문2), 최정섭(신방3), 김관회(경제2), 마철현(사1), 김병준(수2)(이상 5월 10일 제적자)


백윤기(농화2), 박준근(식공2), 임수항(정외1), 박재성(법1), 박해덕(노문1), 김용출(통계1), 김교웅(경영3)(이상 5월 10일자 무기정학) (고대신문 1975년 6월 3일)

 

1975년 5월 9일 고대생 멸공궐기대회



5월 9일 북괴의 야욕을 규탄하는 본교생 궐기대회

멸공 선봉 다짐

본교생 3천 명 궐기대회, 휴교 중 이공대서.

북괴의 적화야욕을 규탄하고 멸공대열의 선봉에 나설 것을 다짐하는 궐기대회가 지난 5월 9일(금) 상오 10시 이공대 운동장에서 3천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휴교령 발동 이후 처음으로 교내 출입이 허용되었던 이날 궐기대회는 북괴 성토 대통령께 드리는 선서문,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만세 삼창의 순으로 진행됐다.

대통령께 드리는 선서문에서 우성식(전 농대학생회장) 군은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조국의 앞날을 위해 면학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이몽룡(전 전경대 학생회장)군은 난국일수록 뭉치고 역경일수록 응결하는 위대한 민족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해야할 시기다라고 국민에세 호소했다.

이날 궐기대회는 김일성 화형식 때 피크에 올랐으며 타도 김일성이란 혈서를 쓰는 등 멸공의 굳은 의지를 보였다(고대신문 1975년 6월 3일).

 

1975.5.13 긴급조치9호 발표

 




1975년 5월 13일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선포.

긴조9호 시대 개막(고대신문 1975년 6월 3일).


당시 국제 상황을 보면 4월 17일 크메르 루주군이 수도 프놈펜시를 점령하고 정부군이 전면 항복했다. 이어서 4월 30일 남베트남 정부가 북베트남군에게 무조건 항복하여 베트남이 통일되어 버렸다. 그리고 5월 8일 라오스에 공산정부가 들어섰다. 이러한 인도차이나에서 일어난 일련의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박정희 정권에게 안보위기의식 고취를 통해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때 나온 조치가 긴급조치 9호였다. 긴조9호에 의해 고려대 학생운동도 긴 동면의 시기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1975.5.14 총학생회 해체



총단 등 모든 자치활동 중지-5월 14일 교무위원회에서 결정.

본교의 총학생회를 비롯한 모든 학생자치활동기능이 정지되었다. 교무위원회는 지난 5월 14일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사상.종교 서클 12개를 해체시켰다. 해체된 서클 명단은 다음과 같다. -동수회, 도산연구회, 민족이념연구회, 한국민족문화연구회, 청년문제연구회, 중국문화연구회, 민사법학회, 카토릭학생회, 기독학생연합회, 대학생선교회, 불교학생회, 원리연구회 (고대신문 1975.6.3)

 

1975 2학기부터 교련교육 강화


2학기부터 교련교육 강화- 교련시간 주 2시간에서 4시간으로 2배 증가.
대학생의 전력화로 국가방위력을 증대하기 위해 현재의 주당 교육 시간을 주당 2시간에서 4시간으로 늘리고 재학기간 중 1학년 때 병영집체훈련을 10일간 실시한다. 교육대상 학생은 현역, 예비역학생 등을 포함한 123학년 남학생 전원으로 확대(병역면제자 및 심신장애자 제외)하고 군사교육이수자는 군복부기간을 현재 3개월에서 6개월로 단축시킨다.(고대신문 1975.6.17)


학도호국단 결단식


학도호국단 결단식이 6월 30일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정부는 5월 20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전국98개 대학총학장회의에서 학도호국단 조직 및 군사교육강화에 관한 조치를 시달했다. 정부는 “고등교육기관의 체제를 국가안보의 차원으로 바꿔 일면 면학, 일면 호국이라는 새로운 질서에서 교수와 학생들의 단결된 지혜와 힘으로 대학과 국가를 지켜야한다는 단호한 결의를 보여야할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학도호국단 조직은 문교부 시도교육위원회 및 고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학생 및 교원을 포함한 군사교육편제를 편성, 평시에는 교련을 비롯 각종단체 활동,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고 전시에는 후방질서 유지와 지역 방위임무를 맡게 된다.

중앙호국단 총재는 대통령, 부총재는 국무총리를 추대하며 문교부장관이 단장, 차관이 부단장이 되고, 학교 학도호국단 단장은 당해 학교의 총장, 학장 또는 교장이 되고 부단장은 대학의 경우 학생처장과 학생군사교육단장이 맡는다.
또 학도호국단에 학생제대(梯隊)와 운영위원회를 두고 그 밖의 학생단체를 조직하려면 문교부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고대신문 1975.7.1).

 

출처 : 고대민주동우회
글쓴이 : 정진만(신방8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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