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回想

학창시절 回想 -2-

金 素軒 2008. 7. 3. 21:44

안암동 캠퍼스 시절이 암울했던 시절이라서 낭만 보다는 荒凉함을 느낀다.

71년 가을 위수령 사태로 전두환 대대장이 이끄는 수경사 병력이 캠퍼스에 진주하여

야만적 폭력을 휘두르고 수백명의 선배들을 수경사 연병장에 끌고가서 린치를 가하고,
김상협 총장님이 총칼에 '知性과 野性'의 상아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명연설을 기억하면서
靑雲의 꿈을 간직한채 입학하였다.

안암동 시절 4년동안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되돌아 보면
72년 유신정변으로 시작하여 75년 긴급조치 9호로 끝났다.
캠퍼스는 편안할 날이 없었고 조기 방학이 되풀이되고, 운동권 동료들은 구속되어

차가운 시멘트 바닥위에 신음하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유신헌법은 잔인한 폭력성을 가진채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였다.

존경하는 교수님들이 생각난다.

특히 60년대 思想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신 故 申一澈(철학과), 呂石基(영문과), 玄勝種(법학과)교수님과

장준하 선생의 광복군 동지인 사학과 김준엽교수님의 선비다운 모습과

知的인 이인호 교수님의 하얀 버버리 코트가 멋져보였다.

서클활동으로 유인종(교육학과)교수님과 청평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이희봉(법학과)교수님한테 민법총칙을 배울때 '無主動産은 先占이 임자다' 라고 했을때
"여자도 동산에 속하느냐?"는 愚問을 하기도 하고,

김하룡(정외과)교수님 한테서 '모택동 사상"을 배울때

'하늘의 반이 여자이다.'고 할때
지아비 夫는 하늘(天)보다 높은데 하고 치기어린 반문도 하였다.


긴급조치 당시 운동권 친구가 구속이 되어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친구 부친이 S은행 지점장이 었는데 아들이 데모하였다고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해고되고 홧병으로 소주로 세월을 삭이다가 � 년 후 돌아가셨다.

독재정권은 그렇게 무자비하고 야만적이었다.

74년 봄 교정에서 데모가 한창일때 학생회관에서 몇백 명이 밤세워 데모 하느라고 모였는데

한밥중에 申一澈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이 들이닥쳐 해산시키느라 학생들과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교수님들의 걱정은 데모가 밤세워 계속되면 또다시 위수령사태와 같이 탱크가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잔인한 계절에도 통키타와 생맥주, 청바지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화두였고.
인촌동산 잔디밭에서 양희은의 '아침이슬'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 노래 가사를 외우기도 했다.

50년대 명동의 Romanticist 詩人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 '목마와 숙녀' 詩가 가수 박인희의
노래로 불려져 애청곡이 었고, 심야 동아방송에서 윤형주 DJ의 "In the year 2525" 시그널곡이
아직도 기억에 맴돈다.

제기동 막걸리 집과 안암동 로타리에 위치한 심지 음악다방이 무료함을 달래는 안식처였다.
명동의 생맥주 집 '뢰벤브로이' '카이저호프' 'OB's Cabin"에 미팅후 들리느라 가벼운 지갑사정에
무리하여 국민은행 안암동지점에 향토 장학금 올때까지 하숙집 옆 수퍼에 외상거래힌 낭만(?)도 있었다.

비탄과 恨 으로 얼룩지고 Platonic Romance를 간직한채 4년이 흐르고

 세상사 거친들판에서 30년이 지났다.

浩然之氣로 가득했던 젊음은 흘러가고 지나간 세월은 아스라이 추억으로만 남고,

아득한 세월속에 묻어버리고 인생의 황혼기로 서서히 접어든다.

아!!! 인생무상이여!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다.
지조의 변절은 육체의 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조지훈 교수의 志操論에서)

芝薰은 비록 48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그의 일생이야 말로 진실로 티하나 없이 살다가
玉처럼 부서져 간 깨끗한 인생이었다 (洪一植(국문학)교수님의 말씀)





'학창시절 回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창시절 회상 6  (0) 2008.07.18
학창시절 회상 5  (0) 2008.07.18
학창시절 회상 4  (0) 2008.07.16
학창시절 회상 3  (0) 2008.07.16
학창시절 回想 -1-  (0) 2008.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