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스크랩] 순천 조계산(선암사, 송광사)

金 素軒 2012. 11. 19. 22:00

하늘을 거스르지 않는 땅 순천 그곳에 조계산이 있으며 그 산자락에 태고종본찰 선암사와 삼보사찰 중 하나인 조계종총림 송광사가 있다.

 

1948년 여수 순천 반란사건 때 조계산으로 도망온 빨지산과 그를 토벌하던 군대와의 틈바구니에서 가슴 아픈 수난을 겪었던 조계산, 이어 계속된 6.25 전쟁으로 전화의 아픔은 계속 되었고, 전쟁 후(1954)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시작된 비구승과 대처승과의 싸움 (세간에서 이를 법난이라 부른다) 한복판에서 만신창이가 된 선암사.

 

선암사의 과거를 들여다 보면 한국불교의 두 기둥 조계종과 태고종의 역사가 보이고 두 종파의 이야기를 쫒다 보면 멀리 고려 신라까지 한국 불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선암사보다 더 크고 더 오래된 사찰이 많이 있지만 선암사 만큼 한국 불교를 극명하게 상징하는 사찰은 없는 것 같다. 선암사는 어느 사찰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어느 사찰처럼 장엄하지도 않으며 어느 사찰처럼 멋진 파노라마의 장관을 보여 주지도 않는다. 허지만 유홍준교수처럼 한국최고의 미술 문화재 전문가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선암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선암사. 다리하나 누각하나 건물하나 현판 글씨하나 담장따라 서 있는 늙은 매화 나무 하나 하나 모두가 보물이요 문화재요 천연기념물이다. 빛 바랜 단청에, 지나간 옛이름에서 천년 세월의 역사가 켜켜히 쌓여 있음을 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고 했다. 그때 보이는 건 전과 같지 않다고 했다. 사연을 알면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문화재 보물들.. 오늘 이곳 선암사에서 고대72동기회 후원 산행대회를 갖는다. 동기들과 함께 선암사를 걸으며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옛날에는 고즈넉한 산길 이였다는 선암사 진입로, 지금은 이차선 도로 규모로 확장되어 차량도 여유롭게 오갈 수 있다. 길 따라 오른쪽에 제일 먼저 보이는 부도전. 천 년하고도 수백 년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간 고승들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시간에 쫒겨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으나 멀리서 보는 사리탑과 비석만으로도 선암사의 역사와 위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혹시나 수도승이 이곳을 지나려면 옷깃이라도 여미고 숨소리도 죽여가며 일보일보 합장하는 마음으로 지나야 할 일이다.

 

사자머리에 올린 부도탑, 화려하게 장식한 부도비석들이 일렬로 여덟기가 질서 정연한데 세번째만 유독 오른쪽으로 돌아서있다. 몇 군데 자료를 찾아 봐도 제대로 설명을 해 주는 데가 없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혹시 관심이 있다면 비석들 하나 하나의 받침돌이나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물이나 조형물을 들여다 봄도 재미 있을 것이다.

 

 

 

 

 

선암사는 태고종의 근본사찰이다. 조계종의 조계사 같은 곳이다. 태고종은 대처승이 있는 사찰이다. 태고종이라고 모두가 대처승은 아니다. 태고종에도 비구승이 많이 있다. 왜정시대 때 승려들의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었기에 해방 후 파악된 바로는 대처승이 4000~7000, 비구승이 300~400명 정도로 대부분이 대처승이였다.

 

억불정책으로 천덕꾸러기 였던 조선시대 승려들은 호구지책으로 신발, 종이 등을 만들거나 잡역에 종사해서라도 사찰을 먹여 살리고 운영을 해야 했다. 이러한 승려를 사판승이라 했고 산으로 들어가 참선이나 강경에만 몰두하는 승려를 이판승이라 했다.

 

사판승은 주로 대처승이며 이판승은 비구승이였다. 사판승이 사찰운영에만 매달려 불교 본연의 수행을 소홀히 하는 폐단도 있었으나 당시의 사회적 천대를 참아가며 사찰은 운용하고 유지하였기에 오늘날의 사찰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판승이 사찰을 유지하고 이판승이 불법(佛法)을 이어 갔기에 오늘의 한국불교가 살아 남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천대받는 중이 된다는 것은 이판승이던 사판승이던 마지막 선택이였기에 이판사판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선암사를 지키는 장승의 눈매가 매섭다. 사찰 입구에 민간 신앙적인 요소가 강한 장승이 서 있다는 자체가 선암사의 친민생 포교 정신을 보여 주는 듯 하다. 가까이서 보면 장승이 사천왕을 닮았다 (선암사는 조계산 장군봉이 보호 해 준다고 사천왕을 세우지 않았다)

 

 

 

 

 

계곡물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지만 그 계곡을 따라 걸으며 승선교(昇仙橋)를 만난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홍예교로 칭송받는 승선교(보물 제 400). 물이 많으면 반원이 물에 반영되어 완전한 원이 그려지며 그 원을 통해 강선루(降仙樓)가 보일 때 선계가 보인다. 이름대로 선녀가 오르고(昇仙) 내리는(降仙) , 신선들이 사는 곳이다. 불교 용어로 극락의 모습이다.

 

반원 중심에 삐죽 튀어나온 용머리 모양의 쐐기돌(이무기돌이라고도 함)이 다리의 중심을 잡아 주는 듯 하다. 그 쐐기돌을 빼면 다리가 무너 진다는 전설이 있다.

오늘은 선녀대신 72의 미녀들이 승선교를 접수했다.

 

 

 

 

 

 

승선교는 원래 두 개다 자 형태로 먼저 작은 승선교를 건넜다가 다시 큰 승선교를 건넌다. 지금은 직진하는 큰길이 만들어져 있지만 발품을 들여 자로 다리를 건너봐야 제대로 선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큰 승선교는 2004년 해체 보수하였으나 작은 승선교는 최초 만들 때의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승선교를 지나면 바로 만나는 강선루. 통상 일주문을 지나고 나서 이러한 누각을 만나는 게 일반적인데 선암사에서는 강선루를 먼저 만난다.

 

승선교와 함께 선암 제1경을 만들어 주는 강선루는 너무 물가에 붙여 짓느라 누각 다리 하나가 계곡에 빠져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세가지 새김()을 의미한다는 삼인당(三印塘) 연못. 타원형 연못 안에 동그란 섬을 만들고 섬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유홍준 교수에 의하면 이 못을 토목공학적, 종교적, 미학적으로 설명한다. 비탈길에 세워진 사찰이라 큰 비가 오면 바닥이 패이고 토사 피해가 심해 일단 물을 연못에 모았다가 계곡으로 흘려 보내고, 연못 안에서는 섬이 물의 흐름을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어 물이 고여 썩는 것을 막아 주는 토목공학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섬을 만들어 줌으로 해서 연못의 깊은 공간감을 갖게 되며 더 커 보인다는 미학적 설명을 한다. 선암사 안에는 이러한 기능을 위해 6개의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주문 앞에 하마비가 서 있다. 아무리 높은 분이라도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가셔야 한다는 표시. 사실 말을 탄 채로 일주문을 통과하기엔 불가능한 구조다.

 

이 곳에 말을 끌고 온 양반집 하인들은 끼리끼리 모여 주인집 인사 욕도 하고 남의 집 인사들 이야기도 하고 인물평들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물에 대한 하마평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담장이 붙어 있는 일주문, 역시 일반 사찰의 일주문과 다르다. 사람이 사는 듯한 집 느낌을 주는 일주문 그래서 일주문 지나는 것이 동네 여느 양반집 들어 가는 기분이다.

 

산속에 달랑 일주문을 세워 놓고 승()과 속()을 구분한다는 대부분의 일주문 보다 훨씬 친근감이 든다.

 

사찰구조가 계획 조성된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산비탈을 깍아 지은 건물들이라 사찰 경내가 어느 작은 마을을 연상케 한다. 일주문 현판을 어째서 세로로 두글자씩 썻는지 궁금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강당 건물인 만세루가 보이는데 만세루 후면에 유명한 육조고사현판이 보인다. 달마대사가 살던 시대부터 있던 오래된 절이라는 의미로 서포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김익겸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들어가 끝까지 청나라를 배척하다 김상용과 함께 화약을 메고 순절한 척화대신으로 유명하다.

 

광산김씨인 그의 집안은 조선시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던 대제학 (2품이나 영의정, 좌의정 보다도 명예롭고 자랑스런 관직)을 특히 많이 배출한 명문 사대부가였다. 우리나라 유교역사 중 유일하게 부자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가 나란히 문묘배향 (공자묘에 배향되는 것으로 신라 고려 조선 통 털어 18명이 배향됨)되는 영광을 누린 대단한 가문이다.

 

김익겸이 순절할 때 김만중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과 그의 형 김만기를 모두 대제학으로 길러 낸 그의 어머니 (해평 윤씨, 김익겸의 부인)는 조선 500백 역사에 당당하고 훌륭했던 조선의 여인이자 어머니로 추앙 받는다.

 

어떤 인연으로 선암사 만세루에 김익겸의 글씨가 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힘과 멋이 한껏 발휘된 명필로 평가 받는다. 멋을 부려 쓴 자를 아는체하고 다른 글자로 읽으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간에 쫒기어 대웅전으로 바로 올라서니 고색이 창연한 그러면서도 장엄하고 화려한 대웅전(보물 제 1311)과 그 앞뜰에 놓여진 삼층석탑(보물 제395) 그리고 괘불석주가 눈에 들어온다.

 

선암사 대웅전은 본존 석가모니불 옆에 협시불이 없는 단독불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협시불은 본존불에 따라 달라지나 석가모니불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모신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의 수인 때문이라는데 그 이상의 내용은 모르겠다.

 

선암사 대웅전의 현판 글씨는 순조의 장인 김조순의 글씨로 金祖淳書라는 두인을 새겼다. 원래 사찰 대웅전 두인은 임금 글씨가 아니면 새길 수 없는데 김조순이 두인을 새긴걸 보면 그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를 짐작케 한다.

 

이곳 대웅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마당에 석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유난히 화재가 잦아 (기록상 큰 화재 5) 불을 상징하는 것을 모두 없앴기 때문이다. 한때 재력있는 신도가 석등을 시주하여 잠시 세운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산속으로 치웠다고 한다. 화재에 예민해진 선암사는 한때 사찰명도 해천사(海川寺)로 바꾼적이 있었다. 일주문 안쪽에서 보면 지금도 전서체로 쓴 古淸凉山海川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석등이 없는 대웅전 마당에 국내 최대크기(12m)의 괘불을 걸기 위한 석주가 유난히 커 보인다. 대형괘불을 걸고 야단(野壇)을 설치하여 부처님 말씀을 듣는 자리(法席)가 과연 얼마나 시끌벅적한 지 궁금하기도 하다. 정말 야단법석을 떠는 자리일까..

 

 

 

 

 

대웅전 옆 신입 승려들이 선공부하는 선방인 심검당의 환기 구멍에도 물 수()와 바다 해()자가 새겨져 있다. 불을 멀리 하고픈 마음이 경내 곳곳에 눈에 띈다.

 

 

 

 

 

시간의 재촉을 받고 다른 곳은 생략하고 우선 그 유명한 선암사의 뒷간 해우소를 찾았다. 정유재란 당시에도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화장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뒷간(화장실)이다.

 

자형 건물로 왼쪽은 남성용 오른쪽은 여성용으로 된 공동화장실. 안에서는 창살 틈으로 밖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안보인다. 위고 앞이고 오픈되어 있고 칸막이 높이도 사람 앉은키 정도다. 속에 톱밥을 뿌리고 통풍도 잘 되고 하여 냄새도 없는 화장실이다.

 

간판을 깐뒤라고 써놓았으며 뒤부터 읽으면 뒷깐이고 왼쪽부터 읽으면 깐뒤. 뒷일을 보려면 먼저 까야 되니 깐뒤도 맞고 뒤깐도 맞다. 여유와 해학이 돋보이는 스님들의 센스다. 들리는 말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도 추진할 거라고 한다.

 

 

 

 

 

뒷깐 입구에 정승호 시인의 선암사라는 시가 목각되어 걸려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러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무우전 담장길의 매화는 천연기념물이다. 철이 아닌 관계로 화려한 홍매 백매의 장관은 없지만 수백년 살아온 노매의 등걸에 푸른 이끼만으로도 노매의 아우라가 충분히 빛난다. 잊지말고 매화 꽃피는 시절에 다시 와볼 일이다. 흙담장 넘어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 속에 이 가을도 끝나가는 듯하다.

 

 

 

 

 

 

 

선암사 경내를 몇 군데 일견하고 산행대장의 안내(?)를 받으며 송광사를 향한 천년불심길로 접어들자 시원한 편백나무 숲이 길을 튼다. 유명한 보리밥집에서 늦은 점심과 막걸리 몇 잔으로 배를 채우고 또 다시 서둘러 송광사로 향한다.

 

시간이 늦어 송광사는 돌아보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송광사 가는 길의 사진 몇 장을 올린다.

 

 

 

 

 

 

 

 

 

 

-끝-

 

출처 : 고대72사진카페
글쓴이 : maru 원글보기
메모 :

11월 17일 순천 조계산을 72동기 90여명이 버스 3대에 나뉘어 타고 다녀왔다.

일부사진과 유대준 동기가 쓴 글을 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