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스크랩] 향산고택 순우 홍기 사돈댁-김락외 3대8명 독립운동가(독립운동로드는 김락을 연으로 내압과 임청각으로 다시 무실로 이어져

金 素軒 2014. 12. 10. 19:54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편액은 이고(貳顧) 이동흠(李棟欽)가 썼는데 주자의 '재거감흥'이란 글에서 따온 것이다.

 

 

 

 

향산고택 響山古宅 - 이만도李晩燾
| 진성이씨 유적 - 宗宅 외
이후림(우포22세) | 조회 207 |추천 0 | 2009.10.2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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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고택 響山古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

현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안막동 119번지.

건 축 주 : 이만도李晩燾.

건축시기 : 19세기 전반

이건시기 :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이건)

소 유 자 : (관리자 : 이부 / 이동석)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호, 1973년 8월 31일 지정, 1동

안동의 퇴계로가 시작되는 지점. 이곳에는 작은 골짜기 안에 앞뒤로

진성이씨 가문의 두 집이 나란히 서 있다.

뒤에 서 있는 것은 치암고택이고, 앞에 서 있는 것은 향산고택이다.

치암고택은 규모가 크며 향산고택은 규모가 작다.

향산고택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한일합방의 울분을 단식을 통해

항의하다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옛 집이다.

원래 안동군 도산면 토계동에 있던 것을 안동댐 수몰로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986년 3월에는 한 집안 3대의 독립유공을 기려

‘삼대독립운동가문’ 으로 지정하였다.

이 가옥은 一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로 이루어진 口자형 집이다.

▼ 향산고택 전경

향산고택 평면도

향산고택 담장과 대문

향산고택 대문

중문 쪽의 벽면에는 커다란 사진이 하나 유리액자 속에 넣어져 있다.

‘향산고택을 출입하는 모임, 2005. 2. 12. 합동세배.’

임청각 군자정이라는 글씨가 액자 속에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 사진이다.

향산고택의 사랑채

향산고택의 사랑채 정면

사랑채 정면에 향산고택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바깥마당 쪽으로 폭 좁은 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쪽마루 앞에는 각 칸마다 하나씩, 세 개의 시멘트 섬돌이 놓여 있다.

바깥마당 쪽 기둥 하나에 ‘도청유치주민연합’ 현판이 종으로 나붙어 있다.

방은 둘이다.

중문 쪽은 2칸 방이고, 중문 반대편은 1칸 방이다.

방 안에는 책들이 빙 둘러 있다.

오래 된 책들은 여기 없고, 지역에서 출간된 책들, 서점에서 볼 수 있을 만한 책들이다.

향산고택 사랑채 좌측면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지붕 옆에 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을 달았는데 일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향산고택 좌측면 전경

좌측부터 2칸의 부엌, 1칸의 행랑채, 우측은 사랑채이다.

향산고택 안채 정면

중문 안으로 들어가면 좁은 안마당이 있고, 좌측으로는 역시 좁직한 울타리 안 밭이 있다.

안마당은 바깥에 나직한 담을 돌리고 사각형의 화단을 또 만들어 두었다.

그 한쪽에는 수도가 붙어 있다.

안채 양쪽에 방 전면에 폭이 60㎝되는 마루를 둔 것 또한 독특하다.

안채는 사랑채 쪽을 향하여 입을 벌린 ㄷ자 형상이다.

중문 쪽에서 보았을 때 좌측의 내려 그은 선 쪽으로는 툇마루가 딸린 작은 방 하나와

그 안쪽, 위의 횡선이 시작되는 부분의 부엌이 있다.

여기 방은 중문 쪽으로 툇마루가 붙어 있는 것인데,

방의 중문 쪽 아랫부분은 조금 들려 있는 형상이다.

방의 한쪽을 낮은 누각식으로 처리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구조는 그대로 오른쪽 끝 방에도 적용된다.

좌우대칭의 모습을 갖춘 셈이다.

ㄷ자 형상의 위쪽 횡선은 앞에서 말했듯이 좌측 끝으로는 부엌을 두고 있고,

우측 끝으로는 광을 두고 있다.

가운데는 3칸인데, 부엌 쪽 2칸은 앞에 쪽마루가 가설된 각 1칸씩의 방이고,

이 두 개의 방과 광 사이의 1칸은 뒤쪽 벽에 나무판 문이 달린 마루이다.

집도 아담하고, 공간도 협소한 것이 향산고택이다.

아마도 하계에서도 이런 규모였기에 옮겨와서

이렇게 작고 아담한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이리라.

 

향산고택 안채 좌측면 내부

행랑채는 중문과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방은 밖을 향하여 방문이 하나 달려 있다.


 

향산고택 안채 우측면 외부

향산고택 안채 우측면 내부

사랑채에 걸려 있는 사진 속의 옛 집이 작고 아담한 모습인 것이 그 점을 증거해 주었다.

향산 고택의 좌우는 낮은 산기슭으로 둘러막혀 있다.

뒤쪽은 치암고택이다.

치암고택이 상당히 높은 지점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향산고택의 뒷 담은 축대 형상이 되어 버렸다.

높은 축대 위에 치암고택의 주차장이 위치하여 있다.

치암고택 주차장의 바닥은 향산고택 지붕보다도 높은 위치인 것이다.

향산고택 들어가는 앞쪽의 2차선 도로는 심하게 굽어 있었으나

이제 새로 도로가 닦여서 상당히 바로잡혔다.

안동시의 외각 변경에 향산고택 지역이 편입되고 있는 중인 것이다.


현 판

향산구려響山舊廬 138.0×47.0

향산은 이만도李晩燾의 호이다.


고택의 사랑채에 걸려 있는 이 현판의 서체는 추사체로써

조금은 날카로움이 덜하고 얌전해 보인다.

이고재貳顧齋

굵고 박력이 있으면서도 날렵함이 함께하여 부담감이 전혀 없이

상쾌한 느낌의 행서이다.

이고는 향산의 손자인 이동흠李棟欽 (1881~1967)의 호號로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다.


기암고택起岩古宅

기암은 이만도의 장자인 이중업李重業의 호이다.

반산재泮汕齋


관련문집

- 쌍절록雙節錄

토계동 향산고택에서 소장하던 것으로,

겉표지만 쌍절록이라고 되어 있고

안의 실제 내용은 의사공실기義士公實記이다.


- 향산문집響山文集 - 인출편

이 책은 토계동 향산고택에 소장되어 있던 향산문집의 인출편認出編이다.

이만도李晩燾의 향산문집을 활자본으로 찍기 전에

문집의 체제나 내용을 교열하고 교정하기 위한 것이다.

- 향산가전響山家傳 - 필사본

이 책은 토계동 향산고택에서 소장하였던 향산가전이다.

필사본인 이 책은 이만도李晩燾의 집안 내력과

이만도의 생애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관련문서

-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음주례는 그 고을 관아의 수령이 주인이 되고,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큰 손님으로,

그 밖의 유생儒生들을 손님으로 모시고 이루어졌다.

- 진성이씨 향음주례홀기鄕飮酒禮笏記

온 고을 안의 유생이 모여서 읍양揖讓 (겸손한 태도를 가짐)의 예를 지켜

술을 마시던 잔치로 서로의 대한 예의 예절 등을 사사, 교습하는

지역 선비간의 회합이라고 할 수 있는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의식절차를 규정한 홀기이다.

- 향산 예장지禮狀紙


이「예장지禮狀紙」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장손의 혼인과 관련하여 참봉댁에 보낸 것이다.


관련유물

- 요표料標

料標(李彙濬) 향산고택에 소장되어 있던 요표料標이다.

두 개 모두 이휘준李彙濬의 것으로

하나는 1861년(철종 12) 3월에 통훈대부 행홍문관수찬通訓大夫行弘文館修撰에 임명한 것이고,

또 하나는 1862년(철종 13) 8월 통훈대부 행홍문관교리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에 임명한 것이다.

이휘준(1806~1867)의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는 심부深父, 호는 복재復齋이다.

이용석李龍錫의 문인으로 1856년 별시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장령, 승정원동부승지,

대사간, 호조참의, 돈녕부도정, 대사성 등을 지냈다.

저서로 『복재집復齋集』이 있다.

관련인물

- 이만도李晩燾 (1842~1910)

이만도는 186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875년에 지평指平,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으며,

1876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 때 일본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반대하여 격렬한 상소를 올린

최익현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다시 양산군수로 복직되었을 때에 양산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가렴주구가 심한 관찰사를 면박하여 사과를 받았다.

1882년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이 되고,

부장副將에 이중린을 임명하여 안동의 의병대장 권세연과 연합해서

안동지방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895년 11월에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조약에 찬동한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마침내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자

이 소식을 듣고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으로써 항거하기로 하였다.

유서를 지어놓고 단식을 시작해서 24일만에 절명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만도는 자가 관필觀必이고 호가 향산響山이며, 배위는 숙부인 안동권씨이다.

이만도는 주류적 의식을 상속받고 있는 조선 말기의 건강한 지식인이다.

그는 조상인 퇴계 이황의 유업을 계승하여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건강하고 힘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도덕과 절의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으면

아름답고 힘 있는 나라가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위기를 향하여 치달려 가고 있었고,

도덕과 절의는 절박한 행동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만도는 정통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이런 위기의 시대와 만났다.

“나는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첫 번째 을미년에 죽지 못하였고,

다시 을사년에 죽지 못하고 산으로 들어가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한 것은

혹 쓰임이 있을까 해서였다.

이제 그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없으니 죽지 않고 살아서 무엇을 바라겠는가?

변란(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여러 날이 지났는데

아직 이렇게 결행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자진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뜻이 정하여졌으니 장차 명동에서 죽고자 한다.”

순국을 결심한 후에 이만도가 한 말이다.

이만도는 죽음을 통하여 의리를 드높이고,

자신이 앞장서서 구현한 의리에 대해 시대가 응답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시대 속을 사는 모든 이들이 의리를 앞장세워서 떨치고 일어나기를 바란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그의 가계 속에 길게 이어져 나간다.

- 이중업李中業 (1863~1921)

이만도의 장자는 이중업이다.

자는 광초廣初, 호는 기암起岩이다.

통덕랑에 제수되었다.

1863년(철종 14)에 출생하여 1921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의성김씨이다.

이중업은 제1차유림단 의거, 이른바 파리장서라고 알려진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3·1운동이 터진 다음 달부터 김창숙 등의 혁신 유림들이 이 운동을 준비하지만,

결과는 별 소득이 없었다.

이중업은 이번에는 중국의 유력 인사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원서를 갖고 중국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타계하였다.

독립운동의 대열에는 이중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아버지 이만도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김중업의 아내 의성김씨,

김락金洛 (1862~1929)도 독립운동을 위해 나섰다.

김희곤 교수의 자료에 “안동의 양반 고 이중업의 처는

1919년 소요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 받은 결과 실명했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한 끝에 1929년 2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밤낮 적개심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을 아들 이동흠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고 있다.

- 이동흠李棟欽 (1881~1967)

이중업과 김락金洛 (1863~1929)의 장자는 이동흠이다.

자는 인길人吉. 1889년(고종 26)에 태어나서 1967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전주최씨이다.

이동흠은 제2차 유림단 사건에 참여하였다.

1925년 가을에 북경에 머물던 김창숙이 독립군 기지 건설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였는데, 이것과 연계된 것이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이동흠은 그 아우와 함께 1926년에 체포 구금된다.

3대가 연이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아들, 사위, 며느리 가릴 것 없이

독립전선에 투신한 것은 아마도 단식 순국하였던 이만도의 절의정신이

이 가문의 상하를 들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도의 가계는 이황의 유지를 상속받아 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다한다.

성리학 세상인 조선으로부터 많은 이익을 상속받는 주류집단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만도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류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그 이익을 향유하는데만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만큼 역사와 시대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은총을 입은 만큼 희생을 치루기를 자임하는 것이다.

그 둘을 역사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다면 아마도 후자 쪽,

그러니까 그들 일문이 치러낸 희생의 무게가 한결 더 나간다고 하여도

그릇된 평가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 이휘철의 가계

이만도는 양자로 들어와 이휘철李彙澈의 가계를 이었다.

이휘철은 자가 형부瀅父이고 통덕랑에 제수되었으며,

1824년(순조 24)에 출생하여 계묘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해주최씨이다.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의 넷째 아들이다.

이가순은 자가 학원學源, 호가 하계霞溪이다.

진사이고, 응교 벼슬을 지냈다.

1768년(영조 44)에 태어나서 1844년(헌종 10)에 타계하였다.

이귀서李龜書의 둘째 아들이며, 조부는 이세사李世師 (1694~1754)이다.

이세사는 자가 성백聖伯, 호가 만화헌晩花軒이다.

1694년(숙종 20)에 출생하여 1754년(영조 30)에 타계하였다.

문과 출신이며 벼슬이 지사에 이르렀다.

진성이씨 14대에 해당된다.

이 계열은 11대 이희철李希哲을 거쳐서 9대 이영도李詠道에게로 연결된다.

이영도는 이황의 장자 이준의 셋째 아들이며,

처음 하계마을에 기지를 잡은 사람이다.

 

불의와 타협 않는 ‘대쪽 선비’를 염원하다

벼슬 대신 평생 선비의 길 걸은 ‘탁청정’ 김유

號에 걸맞은 올곧은 일생…퇴계·농암 등과 교유

영남지방의 개인 정자로는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알려진 탁청정(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전경. 1541년 김유가 건립했다. ‘탁청정(濯淸亭)’ 편액 글씨는 한석봉이 정자 마루에 걸어놓은 편액에 직접 썼다는 일화가 전한다.
옛 선비들, 지식인들은 자신의 호(號)를 따로 정해 사용했다. 정자나 거처를 마련하면 또한 그 이름을 지었다. 그 명칭은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목표 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사는 곳의 지명을 따서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의 후학이나 후손이 그 이름을 지을 경우는 그 주인공의 삶을 대변할 수 있도록 했다. 호가 정자 이름과 일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안동과 그 주변에는 특히 정자가 많다. 그중 선비들이 지향했던 바를 알 수 있는 이름의 대표적 정자 두 곳으로 추월한수정과 탁청정을 꼽을 수 있다. 추월한수정은 후학들이 퇴계(退溪) 이황(1501~70)을 기려 지은 정자이고, 탁청정은 탁청정(濯淸亭) 김유(1491~1555)가 생전에 지어 수양하던 곳이다. 이 두 정자의 이름에 담긴 뜻을 통해 선비들이 추구했던 삶을 엿볼 수 있다.

굴원의 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에서 따온 정자 이름 ‘탁청정(濯淸亭)’ 편액 원본. 탁청정은 김유의 호이자 정자 이름으로, 편액 글씨는 석봉 한호가 썼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성인의 마음을 가을 달빛이 맑고 차가운 물에 비치는 것과 같음을 비유한 글에서 따온 정자 이름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편액. 추월한수정은 후학들이 퇴계 이황을 기려 지은 정자이고, 편액은 근세 설암체의 대가로 알려진 이동흠의 글씨다.

◆퇴계 이황의 삶을 표현한 정자 이름 ‘추월한수정’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은 퇴계종택(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경내에 있는 정자다. 종택 사당 앞에 있는 정자로, 불천위 제사의 제청이나 문중 모임, 예절교육 등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편액 ‘추월한수정’의 ‘추월한수(秋月寒水)’는 말 그대로 가을 달과 차가운 물인데, 성인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 주자(朱子)의 ‘재거감흥(齋居感興)’이라는 시에서 따온 글귀다.

“공손히 생각하니 천 년을 이어온 성인의 마음은(恭惟千載心)/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비춤이로다(秋月照寒水).” ‘재거감흥’에 나오는 이 글귀 중 ‘추월조한수’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의 도학(道學)을 다시 이은 주자가 공자의 마음, 즉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음을 비유하고 있다.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은 퇴계에 대해 “선생의 학문은 명백하고 쉽다. 선생의 도는 광명정대하다. 선생의 덕은 온화한 바람이요 상서로운 구름이다. 선생의 마음과 도량은 가을 하늘 밝은 달이며, 탁 틔어 보이는 얼음 항아리다”라고 표현했다.

‘추월한수’의 의미를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퇴계의 삶과 학문을 표현하고 있는 정자 이름이라 하겠다.

추월한수정은 1715년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1654~1725)이 퇴계의 도학을 추모해 지었다. 퇴계가 공부하며 자라고 은퇴 후 머문 곳에 지었다. 정자 이름도 그가 명명했다. 그러나 이때 지은 정자는 1907년 일제의 방화로 타 버리고, 그후 1926년 유림이 정자를 복원하자는 뜻을 모으고 전국의 450여 문중이 성금을 내 2년여에 걸쳐 정자를 비롯해 사당과 종택 본채 등을 중건했다.

정자 안에 걸려있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산남궐리(山南闕里)’ ‘해동고정(海東考亭)’ ‘이운재(理韻齋)’ ‘완패당(玩佩堂)’ 등 현판 이름도 그가 지었다.

도학연원방은 도학의 본산이라는 뜻이다. 산남궐리와 해동고정은 공자가 태어난 곳인 궐리와 주자가 공부한 곳인 고정이라는 지명을 빌려와 지은 것으로, 추월한수정이 궐리와 고정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완패당’의 ‘완패’는 “나의 패물(佩物)을 누가 완상(玩賞)할 것인가”라는 뜻이다. 패물은 마음에 간직한 패물로, 여기서 패물은 퇴계가 연구·발전시킨 도학(道學)을 의미한다. ‘완패’는 ”퇴계의 도학을 누가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겠다.

지금의 ‘추월한수정’ 편액 글씨는 근세 설암체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1881~1967)이 썼다. 추월한수정 대문에 걸린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 편액 글씨도 그의 것이다. 항일독립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퇴계의 후손이다.

‘산남궐리’와 ‘해동고정’은 해강(海岡) 김규진 글씨이고, ‘이운재’와 ‘완패당’은 해강 제자 홍락섭의 글씨다.



◆선비의 높은 절개와 맑은 삶에 대한 염원을 담은 ‘탁청정’

탁청정(濯淸亭)은 김유의 정자다. 당호는 김유의 호에서 따왔고,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1543~1605)의 글씨다.

탁청정 종택(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 28의 1) 내에 있다. 1541년 김유가 건립했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4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김유의 호이자 정자 이름인 탁청정의 ‘탁청’이라는 말은 초나라 시인이자 정치가이며 충절(忠節)의 대명사로 인정받는 굴원(屈原)의 명작 ‘어부사(漁父辭)’에서 기원한다.

굴원은 삼려대부의 벼슬을 했다. 초나라 회왕(懷王)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중책을 맡겼으나, 주위의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장편의 서정시인 ‘이소(離騷)’를 지어, 왕이 그 글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를 바랐다. 시간이 흐른 뒤 굴원은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양왕(襄王) 때 다시 참소를 당해 강남에 유배되었다. 이때 굴원은 ‘어부사(漁父辭)’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초나라가 진나라에 망하자 그는 멱라강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어부사를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해 대화를 나누는데, 한 사람은 굴원 자신이고 한 사람은 어부이다.

초췌한 모습으로 못가를 거닐고 있는 굴원에게 어부는 삼려대부 벼슬을 한 분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내느냐고 묻는다. 굴원은 세상이 온통 흐린데 자신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홀로 깨어있어 쫓겨난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어부는 왜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고상한 행동을 하다가 추방됐느냐며 나무란다.

굴원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고 하는데 어찌 깨끗한 몸을 더럽힐 수 있겠느냐고 답한다.

이에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는 떠나버린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

어부의 노래에는 굴원 자신의 지나치게 곧고 맑은 삶의 태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탁청’은 이 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는다”에서 온 말이다.

탁청정 편액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정자 편액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편액이다. 편액은 정자의 마루에 걸려 있는데, 현재의 편액은 복제품이다.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이 보관하고 있다.

이런 뜻이 있는 탁청을 호로 짓고 정자의 이름으로도 사용한 김유는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호에 걸맞게 거지와 같은 사람도 성의를 다해 대했지만, 옳지 못한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올곧았다. 그는 벼슬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평생 독서하고 유유자적하며 지냈다. 퇴계를 비롯해 농암 이현보,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 당대의 이름난 선비와도 교유했다. 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했던 그는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무과에 응시하다 낙방하자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는 집 근처에 탁청정을 짓고 선비와 나그네들을 정중하게 대접하며 살았다.

탁청정은 영남 지방에 있는 개인 정자로는 가장 웅장하고 우아한 건물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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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3대 지켜 낸 겨래의 딸,아내, 그리고 어머니~김락

 

나라의 녹을 먹고도 을미년 변란 때 죽지 못하고

을사년 강제조약을 막아내지 못했다며

스므나흘 곡기를 끊고 자정하신 시아버님

아버님 태운 상여 하계마을 당도할 때

마을 아낙 슬피 울며

하루낮밤 곡기 끊어 가시는 길 위로 했네

사람천석 글천석 밥천석의 삼천석 댁

친정 큰 오라버니

백하구려 모여든 젊은이들 우국청년 만들어

빼앗긴 나라 찿아 문전옥답 처분하여

서간도로 떠나던 날

내앞마을 흐르던 물 멈추어 오열했네

의성김씨 김진린의 귀한 딸 시집와서

남편 이중업과 두 아들 동흠 종흠 사위마저

왜놈 칼 맞고 비명에 보낸 세월

쉰일곱 늘그막에 기미년 안동 예안

만세운동 나간것이 무슨 큰 죄런가

갖은 고문으로 두눈 찔려 봉사된 몸

두 번이나 끊으려 한 모진 목숨 11년 세월

그 누가 있어 한 맺힌 양가의 한을 풀가

향산 고택 뒷마루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말 걸어본다

머므는 하늘아 그 어디에 김락 애국지사 보거들랑

봉화 재산 바드실 어르신과 기쁜 해후 하시라고

해거름 바삐 가는 구름에게 말 걸어본다.

김락(애족장)은 하계 양산할아버지 이만도(자정순국독립장)의 며느리다

남편 이중엽(애족장) 아들 동흠(애족장) 종흠(애족장) 사위 김용한(애족장)

친정 오빠 김대략(애족장) 형부 이상룡(독립장) 본인도 물론 애족장을 받았다,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2011년 에는 국회의사당 에서 김락을 주제로 한

뮤지컬이 성황리에 개최한바 있었다.

獨立運動家 25인 낸 安東 下溪마을

 

下溪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제막식 광경

비석 뒤 언덕에 退溪先生 墓所 로 오르는 계단이보인다

 

 

지난 10월 7일,경북 안동군 도산면 하계마을에는 700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불과 10 여호 남짓한 이 마을에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퇴계 선생의 유택 아래, 육사(陸史) 문학관과 왕모산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에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제막식을 보려고 많은 인사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던 것이다.

경과 보고에 이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마을비’는 다른 비석들과 사뭇 달랐다. 두 개의 오석(烏石) 통돌에 음각한 비명과 비문은다른 흰색 화강암과 조화를 이루고,

원주 앞뒷면에는 의(義)와 경(敬) 두 글자를 크게 심각(深刻)였으며

무엇보다 좌우로 두 팔을 벌려 만세 하는 모습은 학의 날개 형태로 표현하여 선비 정신에서 비롯된 독립정신을 상징하고 있었다.

퇴계 선생의 사상을 이어받은 선비정신과 죽음으로 항거한 독립정신,

그리고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의 아픔이담긴 이 비석이 제막되자 보는 많은 이들은 일순간 숙연해 졌다. 100 여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유교 문화의 일번지로 번창했던 마을이였다고 한다.

이름 하여 하계리! 그러나 이 마을의 유래를 들은 이들은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며 그저 망연해질 따름이다여기가 과연 그곳이란 말인가? 400 여년 전 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가 터를 열었다고 하는 이 마을은 도산면 소재지에서 퇴계 종택 방면으로 1km 거리에 있다.

이 마을 앞으로는 청량산을 지나온 낙동강이 흐르고, 남쪽으로 자그마한 언덕을 하나 넘으면 도산서원이 나온다 . 또 이 마을을 지나 강을 거슬러 1km쯤 올라가면 육사의 원천리가 나타난다.

[육사 문학관 개관 기념식 : 04 년 07월 31 일]

퇴계의 묘소가 바로 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하계마을은 오랫동안 150 여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10 여호 정도만 남아있니, 무엇이 유서깊은 이 마을을 이렇게 쇠락하게 했을까 ?

‘향산댁’, ‘계남댁’, ‘정언댁’은 어디로 가고, ‘수졸당’, ‘새영감댁’, ‘초산댁’만 남았단 말인가! 옛 도산초등학교 터엔 비닐하우스가 자리하고 있고, ‘수석정’과 ‘백동서당’만이 남아 옛날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1975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마을은 거의 대부분 물에 잠기고,퇴계 선생 유택 발치에까지 물이 차 올랐다.안동호에 잠긴 집들과 논밭을 생각하니 숨이 턱에 찬다. 하계마을은 일찍이 퇴계 선생이 ‘나를 계적(繼蹟)할 아이’라고 칭찬했고 실제로 퇴계 후사(後嗣)의 기회까지 사양한셋째 손자 동암 선생이 연 마을이어서일까

또 마을사람들이 늘 뒷산에 계신 퇴계 선생을 흠모하며살아온 덕분일까, 이마을은 조선시대 퇴계후손들의 전체문과 급제자 33인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15 명의 급제자를 내었다고 한다.

▲ 退溪 先生 墓所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이곳은 전국의 어떤 마을과도 비교하기 어려우며, 아마 퇴계 후예로서의 정통성과 자부심, 그리고 마을 전체의 놀라운 공부 열풍으로 가능했을 것다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경(敬)의 자세를 갖추고공부에 매진하는 안동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이 떠오른다.퇴계의 영광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안동의 향토문화를 선도해온 대표적인마을이 아니던가 ?

그러나 급제로 끝나거나 한 가문의 영예로 머물기만 했다면 후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묻혀버려도 좋다.한 가문의 족보 속에서 기록으로만 남아있어도 좋다. 민족이 수난을 당하자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를 비롯한 25인은 오랫동안 온축(蘊蓄)시켜 온 정통성과 자부심으로 드디어목숨을 초개같이 던지는 애국의모습을 보여주었다

경(敬)의 자세로 공부하던 그들이 마침내 의(義)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정신적 지도자의 책임을 다하여 모범을 보이는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던 것이다.일제강점기에 하계마을은 이른바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서훈과 표창을 받은 분만도 여덟 분인 향산 가문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죽음을 선택하거나 죽음을 무릅씀으로써 도산(島山)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고이웃 원촌마을에서는 ‘청포도’와 ‘광야’의 육사(陸史)를 낳기도 하였다.

그중 향산 이만도 선생은 영남지역의 대표적인항일지도자로서 호남의 최익현과 쌍벽을 이룬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열어 제자들을 육성하던 중,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킨다.

그러다 급기야 을사조약(乙巳勒約)을 당하자이를 막지 못한 죄인으로 자처하며 고뇌하시다가 마침내 24일간 단식 후 순절하셨다.

또 그의 며느리이자 만주의 독립지사 김대락(金大洛)의동생이며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처제이기도 한 김락(金洛) 여사도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주관한 남편 중업(中業)과 광복회 사건의 아들 동흠(棟欽)의뒷바라지를 하시다가자신은 3·1 예안만세 운동으로 고문을 당해 실명인 채 10 여년의 여생을 살았던 분이다.

어찌 그 분들 뿐이랴! 향산의 삼종질로서 그와 을미의병을 함께 일으켰으며 향산의 자진이 임박할 무렵 단식에 동참하여 순절하신동은 이중언(李中彦) 선생, 3·1 예안만세 운동의 이비호(李丕鎬) 선생,만주항쟁의 이원일(李源一) 선생, 한말에 의병 활동을 하신 이만원(李萬源) 선생, 군자금 모금 활동의 이종흠(李棕欽) 선생 등도우리 민족사 속에서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을 집안이나 문중이 집단적 대규모적으로 단행한 예는 그리 흔하지 않다. 퇴계 선생은 자명(自銘)에서처럼 높고 높은 산과 길고 긴 강이 스스로 되셨고, 후세에 직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마을이 바로 이 하계마을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을 뒷산에서 지켜보시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지만 한 세기가 다 되도록 역사마저도 그들이 추구한 이상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 실정이다.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친일했던 자들이 해방 후 발호하여 대를 이어가며 권세와 부귀를 누리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예안읍은 완전히 수몰되고 도산 9곡도 6곡까지 폐허가 되었으며 도산서원 하나만 남겨두었다. 어떤 이는 안동댐을 지금 조성하려한다면 동강 댐보다 훨씬 더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가히 한국전통문화의 1번지로 세계적인문화 경제적 가치를 지닌 이곳 하계마을을 생각해보면 30년 전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와 안목에 그저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안동댐의 수위를 수 m만 낮추어 하계마을이 지금 존재한다면, 하회마을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무한한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았을까 ? 안동문화를 안례문화(安禮文化)라 해야 옳다고 한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의 말을 상기하며, 다시 한번 아쉬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진다.

향산의 현손인 이동석(안동 독립운동가 유족회 회장)씨가 이 기적비 건립을 추진할 때 마을 내에서는 다른 의견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기적비 건립을 제 조상 위해 하는 일이라 폄하하며 참여하지 않았다지만속내의 또 다른 이유는 짐작만 해 볼 따름이다.

건립 추진의 어려움을 전해 들으며 최근 친일규명법 개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떠올리게 된다.바로 된 우리 현대사라면 진작 세워졌어야 할 기적비가이제야 세워지게 된 것은 만시지탄이다. 이런 노력이 작게는 마을 단위로 크게는 국가 단위로 일어나게 될 때, 늦었으나마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순국하시거나 박해받으신 스물여덟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삼가 깊이 고개 숙인다.

 

2141. 여성독립운동가 20인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김영조의 겨레문화이야기
푸른솔 | 조회 18 |추천 1 | 2011.08.0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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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 옥중의 아들아 /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칼이든 총이든 당당히 받아라 / 이 어미 밤새 / 네 수의 지으며 / 결코 울지 않았다 /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 그보다 더한 영광 없을 지어니 / 비굴치 말고 / 당당히 / 왜놈 순사들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위 시는 얼레빗 작가의 한 분인 이윤옥 시인이 광복절을 맞아 펴낸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에 있는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윤옥 시인은 몇 해 전 학생들에게 여성독립운동가를 써보라고 했는데 거의 백지로 낸 것에 충격을 받아 여성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시를 쓰기로 맘먹었다고 시집 머리말에서 말합니다. 현재 훈포장을 받아 보훈처에 등록된 여성독립운동가는 202명이나 되지만 우리 국민 대다수는 잘 모르고 있지요.

이 시집은 춘천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임신부의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 남자현, 안동의 독립운동가 3대를 지키고 그 자신 만세운동으로 잡혀가 두 눈을 잃었던 김락 애국지사를 비롯한 스무 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시와 그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어 다른 시집에서 볼 수 없는 잔잔한 역사적 감동이 묻어남을 느끼실 겁니다.

이 시집을 내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자료부족이었다고 합니다. 남성 독립운동가들은 많이 알려지고 연구서도 제법 있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는 제대로 된 자료가 많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몇 줄의 기록밖에 없는 분도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분들이 살았던 곳을 확인하려고 직접 임시정부의 피난 길이었던 중국의 항쩌우, 쟈싱, 창사, 꽝쩌우, 류쩌우, 뀌양, 치쟝, 충칭 등을 돌아보았으며, 국내에서는 안동의 김락 지사, 춘천의 윤희순 지사의 생가나 무덤 등도 돌아보았고 생존해 계시는 애국지사인 이병희(95살)ㆍ오희옥(86살) 여사도 만나 보는 등 발로 뛴 흔적이 행간에 뚝뚝 묻어나는 시집입니다.

시집의 표지는 얼레빗 화가인 이무성 화백의 맛깔스러운 솜씨이지요. 책 속에는 무명지 잘라 조선독립원이라는 글씨를 쓰는 남자현 여사의 그림, 백범 김구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의 밥사발 든 모습 등 여러 장의 인물 삽화가 들어 있는데 이 그림도 모두 이무성 화백의 그림으로 사진 한장 없는 애국지사들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간도에 들꽃 피다≫는 나오자마자 세간에 큰 화제가 되어 연합뉴스에서 대서특필하였고, 전국 50여 인터넷신문과 종이신문에서 앞다투어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이제 곧 다가 올 66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노래한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읽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애국이 아닐까요?


▶ ≪서간도에 들꽃 피다≫는 얼레빗 누리집(www.koya.kr) 오른쪽 아래 <김영조의 서평ㆍ음반평>에 서평이 있고 거기서 살 수 있습니다. 책값은 10,000원이지만 얼레빗 독자께는 4권 이상 사시면 권당 6,000원에 보내 드립니다. 그밖에 교보문고, 알라딘, 영풍문고, 반디앤루이스, 예스24, 인터파크에서도 사실 수 있습니다. 널리 알려주시고 사주셔서 무료로 일본이야기를 100회(다음 주)나 써주시는 이윤옥 작가님께 큰 힘이 되었으면 고맙겠습니다

첨부파일 향산 이만도 그리고 김락 지사를 위한 공연에 오열하다.mht

 

 

 

나호정 羅湖亭 - 이만좌李晩佐| 진성이씨 유적 - 정자 외
이후림(우포22세) | 조회 24 |추천 0 | 2009.10.2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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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정 羅湖亭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창 건 자 : 이중민 李中旼.


이 정자는 진성이씨 매당옹梅堂翁 이만좌李晩佐의 정자이다.

예안면 부포리 마을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앙에 마루를 두고 전면에는 사분합문을 만들어 외부와 구분하였으며

좌, 우에 각 1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전면에는 각 반칸의 마루를 두었다.

전면의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각주를 사용하였다.

매당옹은 어려서부터 유가의 경전을 공부하였으며

나부산 및 부라촌에 살면서 노년에 정자를 짓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맏아들인 이중민李中旼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현 판


나호정 113.0 × 40.0

강한 힘이 있으면서도 무겁지 않고 튼튼하게 자리를 잘 지키는

고목처럼 든든한 행서체이다.


매당 74.0 × 35.0

음각이 매우 뚜렷하며 단정하고 힘찬 해서로

무척이나 안정적이며 아름답다.

나호정기 84.0 × 38.0

나호정기
매화가 경전에 출전한 것이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되니,

대체로 심상한 화초나 초목에 비할 바 아니다.

『시경』의 「표매」 시는 열매만 언급하고 꽃은 버리어,

시절 사물에서 느낀 애틋함을 다루었고,

『서경』의 「열명」편은 소금과 함께 나열하여, 짜고 신 맛을 중화하는 뜻으로 썼다.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에서 신선의 꿈에 취하고,

임화정林和靖이 서호에서 매화 향기를 맡음에 이르러서는 열매를 버리고 꽃을 취하였다.

이것은 꽃과 열매 중 일방적으로 버릴 수 없음이니, 그 만난 경우가 다른 때문이다.
우리 종친 어른인 매당옹은 나의 고향 선성의 나부산 밑 부라촌에 살면서

일찍이 스스로 매당이라 칭하셨다.

상고하건대, 매화나무와 나부는 원래 맑은 인연이 있어 더불어 순수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매옹은 소시부터 유가의 경전을 공부하여 매실이 간을 맞추는 물건이란 걸 모를 턱이 없다. 다만, 난세를 만나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해볼 처지가 아니었기에,

매양 달 지고 별 비끼며 매화 향기 가득한 저녁이면 푸른 꽃의 선녀 마고와 더불어 취하고

꿈꾸는 정분을 맺었다.
노년에 이르러 그 사이에 정자 한 채를 두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산의 낙천에 수리 공사가 끝나자 마을은 물이 차서 웅덩이로 변했는데,

오직 호동 작은 일대는 물이 미치지 않았다.

맏아들 중민이 뒤늦게 그 뜻을 이루어 우뚝한 정자를 세우고 ‘나호’라는 편액을 게시하니

완연히 하나의 나부요, 하나의 서호가 되었다.
나에게 기문을 위촉하기에 생각해 보니,

서울의 먼지와 안개에 마음과 의복이 모두 시커멓게 되었거늘

어떻게 감히 더불어 논의하랴?

이에 간략하게 정자의 전말을 서술하여 고향의 고사에 대비한다.

경신년 추석에 족증손 문학박사 가원 삼가 짓고,
족증손 원기 삼가 쓰다.

 

 

이종흠(李棕欽)

성명(姓名)

이종흠(李棕欽)

본관(本貫)

미상(未詳)

시대(時代)

 

자(字)

호(號)

이력(履歷)

이종흠(李棕欽):1900(광무 4, 경자)~1976.

1925년 11월 몽고지방의 미개간지 20만정보를 구입하여 중국에 있는 동포들을 정착시키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한다는 취지를 듣고 모험단원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체포. 1927년 3월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형을 받고 복역. 추서:대통령 표창(1986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본관은 진성이며 이중업의 2째아들임

출처 : 명월루(만회고택)
글쓴이 : 명월루 만회고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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