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학봉종손 金時寅 翁의 영전에서

金 素軒 2011. 9. 9. 19:57

사람의 길]고(故) 김시인(金時寅) 선생 영전에서 학봉종택의 닭

2008 03/04뉴스메이커 764호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학봉 김성일(1538~1593) 집안.

  이 집안의 애국정신은 그 직계 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 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은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학봉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무려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 조용헌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중에서


이상한 일이었다. 안동 학봉종택 안채 마당을 검정닭 한 마리가 유유자적 거닐고 있었다. 이 닭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한쪽 발을 한껏 쳐들어 잠깐 멈추었다가, 이내 앞으로 내디뎠다. 그 모습이 어찌나 도도한지 얼핏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비치기까지 했다. 종손의 상(喪)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였으므로 그 닭은 용케도 제삿날을 면한 셈이었으리라. 평소 대갓집 살림으로 넘나들던 안채는 여전히 삶의 손때로 융숭 깊었다. 툇마루에는 고추가 빨갛게 말라가고 있었고, 기둥에 걸린 살림살이는 낡았으되 정갈했다. 다만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한 안채를 닭 한 마리가 어디서 배운 버릇인지 그렇게 도도한 걸음걸이로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지난 2월 3일 향년 91세로 타계한 학봉 김성일 선생의 14대 종손 김시인 옹의 장례는 근래에 보기 드문 7일장으로 치러졌다. 부음이 전해진 후 문중과 유림을 비롯한 숱한 문상객의 발길이 줄을 이었고, 발인이 있던 날에는 전국의 사진작가들까지 한데 몰려들었다. 고인은 마침내 금계리의 선영에 묻혔고, 4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과객으로 넘쳐나던 사랑채는 이제 여막(廬幕)으로 남았다. 깊은 애도와 탄식도 잦아든 뒤 모두 돌아간 사랑채는 외려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영좌가 놓인 제상 밑으로 고인의 검정고무신이 가지런한데, 향탁의 향불은 자꾸만 사위어갔다. 거기 멈춘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유한한 삶인가, 아니면 시간의 무한한 흐름인가.

고인은 스물아홉의 적잖은 나이에 학봉종가에 양자로 들어왔다. 이미 결혼해서 아들을 둘이나 둔 상태였으니, 소위 ‘둥지리’ 양자였다. ‘둥지리’는 둥지를 통째로 옮겨왔다는 뜻이다. 학봉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 대에 이르러 딸만 하나 있었지 대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으므로 보종(保宗)을 위해 양자를 들였던 것이다. 워낙 손이 귀하던 학봉 집안인지라 김용환 역시 양자로 들어온 종손이었다. 보종을 위한 학봉가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종손으로써 적합한 양자를 물색하던 중 멀리 지례에 사는 일가 김시인을 적재로 낙점했으나, 문제는 생가에서 반대한다는 점이었다. 문중에서는 아예 생가 인근에 집을 얻어놓고 10명씩 조를 짜 교대로 거처하면서 설득과 간청을 반복했다.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읊조리기를 자그마치 일곱 달, 천신만고 끝에 겨우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가 양자로 들어와 보니 집안은 살림 하나 변변한 것이 없을 정도로 궁벽했다. 안동에서도 내노라하던 집안이 그리 된 데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선대인 김용환은 안동 일대에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이 자자했다. 사람들은 명문가의 자손으로 당대에 집안을 말아먹은 대표적인 사례로 그의 이름 석자를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위장이었다. 그는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온 전 재산을 모두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집안 살림이 거의 거덜난 상태였지만, 일제의 감시를 피해 파락호로 위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남몰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것은 할아버지 대의 굴욕 때문이다. 조부 김흥락은 사촌이기도 한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주었다가 발각되어 왜경에 의해 종가 마당에 꿇어앉혀진 채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를 목격한 어린 김용환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그때 이미 항일운동에 몸 바칠 것을 각오했던 것이다.

김시인은 쓰러져가는 집안을 일으켜세우고 종가로서 퇴색한 위치도 바로잡아 나갔다.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되고 습기가 많다는 이유로 인근으로 옮겼던 종택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학봉의 정맥을 이었고, 유림단체인 박약회의 일에도 매진했다. 종가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데 종손과 생년월일이 같은 부인 조필남의 역할이 지대했다. ‘지조론’의 시인 조지훈과 같은 영양 주실마을의 명문가 한양 조씨 집안 출신의 부인은 ‘국량이 크고 성품이 두터울 뿐 아니라 지혜가 뛰어난 종부의 전형’이었다. 종부는 어려운 종가살림 중에도 찾아오는 손님 누구에게나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정성껏 대접하려고 애썼다. 과객이라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으니, 줄 게 없으면 집에서 키운 호박 한 덩이라도 기어이 들려서 보내곤 했다. 종부의 자애로움에 감동한 사람들은 보종사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도 했다. 그 국량이 얼마나 컸던지 그가 작고했을 때는 멀리 대구 시내의 꽃가게까지 조화가 동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고인은 조씨 부인과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 차종손인 장남 김종길(67)씨는 삼보컴퓨터 사장, 나래이동통신 사장, 두루넷 사장과 삼보컴퓨터 부회장을 거쳐 현재는 박약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정보통신업계에서는 최고의 CEO로 꼽혀 TV 프로그램 ‘성공시대’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 프로에서 그는 종손이라는 이유로 ‘갓을 쓴 인터넷 사업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차남 김종필(65)씨는 감사원 부이사관을 지내고 현재 도하종합공사 부회장으로 있으며, 삼남 김종성(57)씨는 LG전자 상무로 근무하다가 현재는 수지에서 같은 회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삼남 종성씨는 고인이 학봉종택에 와서 얻은 아들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그는 누구보다도 집안 내력과 문중 대소사에 대해 정통하다. 집안내림인지 맏형 종길씨에게 딸만 넷이고 아들이 없으니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냈다. 원래 차남인 종필씨의 아들이 양자로 가는 것이 관례지만,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지라 그 아들이 양자로 가고 다시 동생에게서 양자를 들이는 번거로움을 피해 아들이 둘인 종성씨의 장남 김형호(28)씨가 곧바로 양자로 들어간 것이다. 종성씨는 그래서 농담 삼아 자신을 ‘대원군’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형은씨는 안동대 국학부를 거쳐 성균관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안동 내앞마을의 의성김씨종택은 학봉종택의 뿌리가 되는 대종택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학봉은 아버지 청계공이 살았던 고택과 함께 자신이 살았던 학봉종택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학통을 이어받은 양대 제자로, 경세가로서의 측면이 강했던 서애와는 달리 의리가의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아가 싸우다 죽음을 맞았다. 그는 또한 호남사림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기도 했는데, 광주 무등산 자락의 제봉 고경명 집안과 깊은 인연을 유지하다 제봉이 두 아들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후 남은 아들을 맡아 기르기도 했다. 그 끈끈한 인연은 학봉종택 들머리에 세워진 ‘제봉 고경명 의병대장 13대 후손 충효부대장 준장 고재오 기념식수(2004.3.1)’비에서 엿볼 수 있다. 학봉종택의 유물전시관인 운장각에는 학봉이 생전에 사용하던 안경이 보관되어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이라고 한다. 학봉이 그 안경을 쓰고 밝히려 애썼던 것은 무엇일까. 시대의 가치관을 떠나 연면히 이어져오는 사람의 내력은 그것 그대로 사람의 정신을 압도한다. ‘비기자부전(非器子不傳)’이라 했던가. 천박한 자본의 시대에 그릇에서 그릇으로 이어지는 정신은 결코 낡은 것으로만 치부될 수 없다. 또 한 사람이 비워놓고 간 그릇에 우리는 무엇을 채워넣을 것인가.

참고 및 인용 : 조용헌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