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꽃지는 날 낮술을 마시다 (퍼온글)

金 素軒 2010. 5. 19. 19:42

프린트하기이메일보내기폰 보내기MSN 보내기
[세상읽기] 꽃 지는 날 낮술을 마시다 / 김별아
한겨레
» 김별아 소설가

빗방울이 떨어졌다 멈췄다 오락가락하는 날이었다. 유달리 추웠던 봄이 지나자마자 초여름 더위가 몰려와 옷차림을 어찌해야 할지 헷갈렸다. 꽃들마저 사람의 마을에 더부살이해 살기가 겸연쩍은 듯 순서도 없이 제멋대로 피었다 진다. 혼란스런 봄이다. 어수선한 시절이다. 모진 계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밀폐된 방에 모여 연탄을 피운다. 혼자 죽기도 무서워 서로의 죽음에 증인이자 고발자가 되어 죽는다. 함께하지만 지독하게 외로운 죽음이다. 작고 약한 것들이 이토록 낱낱이 고립되어 스러지는 지금이 난세가 아니라면 무언가.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나? 봄비에 젖어 지는 꽃잎에게 물으며 낮술을 마신다. 오늘의 술벗은 십여년 전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때까지 만든 자기 노래의 음원을 모두 버리고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긴 가수 한돌 선생이다. 거의 존시간의 차이가 나는 연배지만, 나는 오래전 그의 팬이었다. 열일곱살에 강릉문화방송(MBC)의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에 그가 만든 노래 ‘불씨’를 신청하고 늦은 밤 라디오 앞에 바싹 붙어 앉아 귀를 기울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노래는 변방의 우울을 앓던 사춘기 소녀의 굽은 등을 가만가만히 다독여 주었다. 일 핑계를 대고 만든 술자리지만 일감은 뒤로 밀치고 오랜 궁금증부터 해결하려 덤빈다.

“오는 길 내내 노랫말이 입속에서 맴도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요. 불씨야, 불씨야, 다시 피어라……고 겨우겨우 희망을 지핀 것 같더니, 그다음 구절이 곧바로, 끝내 불씨는 꺼져 버렸네, 이젠 사랑의 불꽃 태울 수 없네……잖아요? 그럼 뭔가요? 희망인가요, 절망인가요?”

참된 노래를 만들 영감을 얻기 위해 십여년 동안 홀로 산을 오르고 삶을 들여다보며 살아온 가수는 여전히 열일곱살처럼 철없는 팬의 빈 술잔을 채워주며 말한다.

“그게 사실은 1980년 광주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예요. 잠시 민주주의의 봄이 온 듯했지만 금세 칼바람의 계절이 다시 세상을 장악했죠. 그래서 희망의 불씨가 지펴 올랐다 절망의 불씨로 스러질 수밖에요…….”

사랑을 읊조리는 줄 알았더니 광주를 말하는 노래였단다.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곡이란다. 저급 청중의 하나일 뿐인 나는 이십여년 만에야 속없이 따라 부르던 노래의 숨은 뜻을 알아채고 탄식한다. 그렇게 봄이, 5월이 마냥 부끄럽고 괴로웠던 때가 있었다. 계절의 여왕이며 가정의 달이라, 숱한 기념일에 사랑과 감사를 한꺼번에 몰아 바치라고 강요당하는 듯한 나날에도 그저 ‘기념’할 수 없는 슬픔 때문이었다.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폐허의 황무지에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쿠데타와 학살과 정치살인으로 점철된 우리의 5월은 4월만큼이나, 어쩌면 4월보다 더 잔인하고 참혹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났다고 하여 그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다 잊을 수 있는가? 그야말로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라, 철쭉보다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훌쩍 술잔을 비운다.

언젠가 한돌은 자신의 노래를 두고 “노랫말이 8할, 곡은 나머지 2할”이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범람하는 유행가와 경박한 멜로디와 화려한 반주를 등지고 담담하게 풀어내야 할 삶의 타래들. 어쩌면 투쟁의 근거는 외부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걸 잊어버린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세상도, 누가 더 뻔뻔스럽고 표독한지를 경쟁하고 있는 듯한 사람들도, 경조부박한 세대도 세태도 탓할 것 없다. 싸움은 언제나 자기로부터 시작되고 끝난다. 그리하여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나 자신에게 돌이켜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