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스크랩] 의성김씨 종손, 破落戶로 소문 난 金龍煥의 애국

金 素軒 2016. 5. 18. 22:56

 

김용환은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안동시에 현재 시가 200억원이 넘는 저택과 논밭을 가진 큰 부자였으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온갖 노름판을 전전하며 전 재산을 노름으로 날린 것처럼 행세했다. 실제로는 그 돈을 만주에 보내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용환,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가문에 먹칠하는 장손이 나왔다"
'파락호(破落戶)'.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가문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뜻하는 말로, 다른 말로는 '팔난봉'이라고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안동에서 노름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용환은 조선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파락호였다. 노름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도박하느라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땅 700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고, 아내 손을 잡으며 "이제 달라지겠다"고 굳게 약속했지만, 다음날 집에 있는 땅문서를 들고 투전판으로 달려간 인물이었다.

김용환은 경상북도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던 의성 김씨 종가의 장손이자, 조선시대 학자이자 지휘관이었던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었다. 학봉 집안은 대쪽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선비 집안이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던 학봉은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며 의병을 지원하다가 진주성에서 병사했다.

안동에 있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택 /이재우 기자

그렇게 지켜온 가문의 명예가 김용환으로 인해 한순간에 추락했다. 오래도록 쌓아온 집안 재산도 모두 날아갔고 수백 년 동안 대대로 물려내려 오던 전답 18만 평도 노름빚으로 인해 모두 팔렸다.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나중에는 사당 신주까지 팔아치우려는 것을 문중 사람들이 뜯어말렸다. 문중 자손들은 십시일반 돈을 걷어 김용환이 팔아먹은 전답을 다시 종가에 사주곤 했다.

집안 재산을 거덜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딸에게 준 돈마저도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했다. 딸은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댁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헌 장롱이 귀신 들린 장롱이라고 해서 강변 모래밭으로 가져가 부수고 불태우기까지 했다.

동네 사람들은 김용환에 대해 수군거리고 비난했고, '도박에 빠지면 김용환 처럼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윤학준은 <양반 동네 소동기>라는 책에서 우리나라 근대 3대 파락호를 손꼽았는데,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1930년대 형평사운동 투사였던 김남수, 그리고 김용환이 그들이었다.)

쓸쓸한 죽음 뒤 밝혀진 진실,
독립을 위해 싸운 혈기 

김용환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월이 흘러 집안을 망신시킨 난봉꾼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가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으로 보내졌고,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노름꾼으로 철저하게 위장한 독립운동가였다.

김용환이 자신의 정체를 숨겨가며 독립운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릴 적 그는 할아버지 김흥락이 왜경 앞에서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현장을 보게 됐다. 왜경은 사촌인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줬다면서 할아버지를 사정없이 다그쳤다. 어린 김용환은 그 장면을 보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핵심 지도자로서 안동 지방의 의병을 이끌었던 서산 김흥락의 손자답게 문경 등지에서 활약한 이강년, 김상태가 이끄는 의병 부대에 참가했다.

30대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라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단체인 의용단의 서기로 활약했다. 의용단은 만주 길림의 군사조직인 길림군정서에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위해 영남 지방 인사들이 결성한 조직체였다. 의용단은 주로 경상도 지역인 안동, 영천, 군위, 창녕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해왔는데, 대다수의 부호들은 친일파였기 때문에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김용환은 1922년 일본 경찰에 발각돼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일생을 바쳤다
이후 그가 살아갈 방법은 철저한 위장밖에 없었다. 대를 이어 내려오던 막대한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한 것으로 위장한 뒤, 모인 돈을 모두 만주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요즘으로 치면 1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 이런 활동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한국 광복군 성립 전례식 기념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군 군자금을 대려고 철저히 노름꾼 노릇을 했던 김용환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임종 무렵에 사실을 이야기하자던 독립군 동지에게 그는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 없다"며 끝내 입을 다문 채 세상을 떠났다.

반세기가 흐른 뒤 1995년 김용환에게는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외동딸 김후웅 여사는 아버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리'라는 편지를 남겼다.

2004년, 중국에 있던 김용환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현재 안동에 있는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는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참고=역사채널e '역사e: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2)

 

김용환, 전 생(生)을 바친 독립운동


김용환, 후대의 이야기

김용환 동상, 장충단 호국의 길

김용환 동상 /중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서울 중구는 역사문화유산이 밀집한 장충단 공원 일대에 '호국의 길' 도보탐방코스를 개발했다고 올해 2월 1일 밝혔다. 탐방로는 유정 사명대사상과 장충단비,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수표교, 이준 열사 동상, 이한응 선생비,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비, 유관순 열사 동상, 3·1독립운동 기념탑, 국립극장, 김용환 지사 동상, 자유센터로 이어진다.

- 동상 위치 :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59(장충동2가 산14-67) (국립극장 입구 우측)
- 문의 : http://tour.junggu.seoul.kr/tour/index.jsp / 02-3396-4114 (중구청)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전경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

이 기념관은 사단법인 '안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안동 지방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와 안동시의 지원을 받아 2007년 8월 10일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7여년 동안 나라사랑 역사체험 학습, 독립운동 유적 해설사 양성, 독립운동가 후손 상담과 지원 등을 비롯해 독립운동사 발굴과 연구, 출판과 전시 등의 사업을 펼쳐왔다. 이후 2014년 1월에 도 출연기관인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대·승격됐다. 여기에 김용환의 일대기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 위치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독립기념관길 2
- 문의 : www.815gb.or.kr / 054-823-1555


명문가의 자손으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인생을 바쳐 애국했던 독립운동가 김용환. 한평생을 비난받으며 살았던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에 대한 오명을 씻기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애국자였다. 이번 특집으로 지금이라도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바로 아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퍼온 글>

출처 : 고대72한마당
글쓴이 : 산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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