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先親에 대한 회고

金 素軒 2020. 12. 15. 13:42

2007년도에 돌아가신 선친의 함자는 호()자 규()(孟集)이시고, 경북 안동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50년대에 안동사범에서 역사를 가르치셨고, 1962년도에 점촌중학으로 전근하시어 66년도에 교장으로 취임하시어 87년까지 21년 동안 교장으로 근무하시고 퇴임하셨다.

36년동안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면서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몸소 겪으시면서 한평생을 보내신 분이시다.

 

8.15해방되던 해 안동농림을 졸업하시고 46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하셨다.

안동농림 동기가 이낙선(전 국세청장)씨 이고 1년 후배가 박정희 전대통령을총 쏜 김재규와 김계원(전 청와대 비서실장)씨 이다. 그당시 안동농림동기들이 출세를 위해 을 택한 반면 시골의 을 숭상하는 가난한 선비집안에서 학문을 하고져 서울대를 택했다.

서울 유학비는 일제시대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안동농림학교에 선생으로 재직하신 씨께서 부담하고 두형제분이 우애가 깊었다.

48년 본과 재학중 겨울방학때 집안 어르신의 강요로 고향 근처(풍천면 원당리))延安李씨 진사댁 시골 규수와 혼례식을 치루고 58년을 偕老하셨다.

씨께서 6.25 며칠전 서울로 전근도 알아볼겸 상경하여 동생을 만나고 6.25전쟁 이 나던날 아침에 전쟁이 난줄도 모르고 안동에 가기위해 청량리역에서 헤어진 것이 형제간 평생 이별이 된다.

 

서울대 史學3학년일때 전쟁이 일어나 피난도 못가고 동숭동 문리대 교정에 나갔다가 인민군에 붙잡혀 학도의용군으로 차출되어 이태가 쓴 소설 '남부군' 주인공처럼 전선에 투입된다.

지리산 화엄사 부근 전선에 배치되어 19509월 국군과 대치중 함께 참전한 의용군들이 총알받이로 거의 다 전사할 즈음 경성제대 출신으로 인민군 대좌로 모시던 선배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승산이 없는 전쟁'이라고 하며 젊은 후배가 죽는게 안스러워 통행증을 발급해주며 전선에서 도망치라고 하여 지리산에서 백두대간 준령을 2개월여를 걸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문경 새재 조령산을 거쳐서 고향에 11월에 도착했다.

 

그러나 교직에 근무하며 학비를 부담하던 형은 조부의 병환으로 피난도 못가고 고향을 지키다가 인민군 치하에서 '인텔리 겐챠'에게 강제로 쒸운 붉은 완장을 잠시 차고 있다가 국군이 낙동강 전선을 치고 올라오면서 인민군 부역자를 사살한다는 소식을 듣고 살기위해 태백산 기슭에 잠시 피해 있다 돌아 오겠다며 가족에게 이야기하고는 사라진후 인민군 후퇴대열과 함께 영원히 북으로 가셨다.

6.25전쟁으로 인해 형제의 운명이 순간적으로 뒤바뀐다.

고향에서 어르신을 모시고 교직에 종사하시며 좌익사상을 가진것도 이념상 빨갱이도 아닌분은 단지 살기위해 가족을 남겨놓고, 단신으로 북쪽으로 가시고, 서울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전선에서 죽든지, 북으로 가실 분은 생명의 은인인 선배의 도움으로 전선에서 탈출에 성공해서 고향에 정착하신다.

 

형의 빈자리를 메우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1951년 안동사범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교직의 길에 들어서 10년을 근무하셨다.

-1960년도 안동사범 재직중 낙동강변에서 제자들과 동료선생 자제분들과 함께-

문경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 도시계획전문가이신 故 김 안제(金安濟,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명예교수), 류 목기 (전 재경 대구,경북도민회 11대회장), 김호길(金鎬吉, 전 포항공대학장)님, 김호진(高大 행정학과 교수, 전 노동부장관)님 이 제자 분들이시다.

선친께서는 주당이시다.

개인과 형제가 겪은 과 험난한 고통을 주로 술로 삭이셨다.

격변의 시대, 혼란, 불합리, 부조리한 세상사에 초연하시며, 통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곧고, 바르고, 따뜻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셨다.

자유당 시절 어느날 도수가 45도인 제비원 소주를 밤늦도록 동료 선생들과 여러 병드시고 혼자 귀가길에 낙동대교를 건너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아침에 깨어보니 모래사장위 란다.

강물위에 떨어졌으면 그당시 생을 마감 하셨을 텐데...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교원노조(전교조 전신)간부로 일하시다,

5.16쿠테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교원노조 간부들을 구속하여 몇개월 감방에 계시다가 석방되나 복직이 불허된다.

호구지책으로 처가에서 대준 소판돈으로 장사를 하기위해 시장통에 신발가게를 차렸지만 고무신 판돈으로 매일 전직 동료교사들과 술만 드시니 반년만에 다날리고 가게를 문닫는다.

1962년 문경소재 사립학교인 점촌중학(당시 재단이사장 박 시복 님)에 채용되어 얼마후 교장으로 승진하여 70년대 초 점존중학 재단 이사장이 이 희재(전 장자그룹 회장)님께서 취임하시어 학교를 현위치 (문경경찰서 뒤편에서 점촌 돈달산 능선에 위치)로 옮기시면서 몇 년 동안 골조공사부터 체육관 완공까지 튼튼하고 번듯한 학교를 만드시는데 감독하시면서 고생이 많으셨다.

정년 몇년전 그만 두시고 노년을 대구에서 소일하며 지내셨다.

평생 술을 즐기신 애주가 이지만, 검소하게 지내셨고, 가족에게는 자상하고 인자하신 다정다감하신 분이었다.

 

우애가 남다른 형과의 평생이별, 젊은나이에 死線을 넘나든 처절한 경험, 5,16쿠테타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시고 국립사범학교에서 쫓겨난 울분을 한평생 술로 시름을 달래시고, 벗 삼으며 과 분노를 삭이신것 같다.

호구지책을 위해 전쟁중에 교직의 길에 들어 섰지만, 숙명으로 여기시고, 박봉의 월급을 가족의 생계비 외에는 술값으로 지출하시고, 술을 즐기시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평생에 돈을 모으지도, 한 평의 땅도 갖지 아니한채,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가셨다.

생전에 북으로 간 형을 만나거나 소식이라도 듣기위해 2000년 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고 연락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 돌아 가셨다.

 

때로는 시대적 고민을 감당할 수 없어 술에 탐닉 하셨던 선친은 돌아 가신 날도 소주 2병을 드시고 집에서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가셨다.

평소에 술을 드시면 李太白처럼 '酒仙'이나 '醉中仙' 부러워 하시며 취중에 저세상으로 가시는게 소원이라던 소망대로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없이 여든살에 편안한 모습으로 가시었다.

원한도 증오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그토록 보고 싶다던 으로 간 먼저 가신 모친도 만나시길 빈다.

세월의 에 대한 시름을 씻고져 술을 마시다가 당신이 원하던 대로 그렇게 영면(永眠)하셨다.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를 치르는 동안 청명한 봄날씨가 무덤에 잔디가 잘 자라나도록 비가 내린다.